2024년 1월 16일.
하루 전 계절 학기를 종강하고, 바로 다음 날 여행을 떠났다.
쉴 틈도 없이 바로 떠나느라 몸이 무거웠다. 다음에는 시험이든 뭐든 간에 일주일 정도는 텀을 두고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 일본 여행은 청주 공항을 이용했다. 인천에서 출발하면 항공권을 저렴하게 끊을 수 있지만, 집에서 비행기 시간보다 5시간 일찍 출발해야 하며, 작년 8월부터 인상된 공항버스 비용도 무시할 게 못 됐다. 무엇보다 공항까지 이동 편을 예약하지 않아도 되고, 출국 소속 시간이 짧은 점 때문에 청주 공항을 이용해보고 싶었다. 집에서 터미널까지는 세종 시내버스를 이용하고, 세종 터미널(기점)에서 청주공항까지는 13시 20분 B3를 탔다. B3로 70분 소요.
청주 국제공항의 모습. 국내선이 아닌 국제선을 위해 청주 공항에 방문한 건 처음이다.
위탁 수하물을 맡기고 공항을 가볍게 둘러봤다. 1층에는 와이파이 도시락, 카페, 이마트 24 편의점 등이 있고, 2층에는 식당, 약국, 빵집 등이 있다. 있을 건 다 있지만 청주 공항 물가는 상식을 벗어났다. 그나마 2층의 식당이 먹을만해 보였다.
나는 바나나우유와 햄치즈샌드위치를 하나 샀다. 청주-후쿠오카를 오가는 TW247은 지연으로 악명이 높은데 이날도 출발 1시간 30분 전부터 지연 공지(45분 지연)가 떴다. 여행 중 배가 고프면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횡설수설하기 쉽기에 지연된 김에 연료를 공급했다.
다행히 예정보다 10분 빨리 비행기가 이륙했다. 히토요시로 가는 20시 3분 고속버스를 예약해 놓았는데 후쿠오카에서 저녁을 먹기에도 충분히 여유 있는 시간이었다. 19시대 버스도 탈 수 있었지만 밥을 먹기엔 어려워 보였다. 일단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사실에 짐을 덜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 구름 위에 올라 상공에서 바라보는 구름다리와 바다에 펼쳐져 있는 붉은 비단길. 창문을 열심히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준비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18시 40분,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14개월 만에 다시 찾은 후쿠오카 공항이다.
국제선 출구로 나와 하카타 버스터미널로 경유 없이 직통으로 가는 공항버스를 탔다. 나는 기계에서 표를 구매했는데 IC 카드와 현금 모두 사용가능하다. 국제선 건물을 나와 2분 정도 걸으면 버스 타는 곳이 있다. 하카타 버스터미널(하카타역)로 가는 버스는 가장 가까운 4번 승강장이고 줄을 정리하고 탑승을 도와주는 직원 분이 계신다. 다행히 가장 빨리 오는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버스가 꽉 차 인원이 5~10명인 분들은 다음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18분가량을 달려 하카타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내가 탈 미야자키행 고속버스(피닉스호)는 3층에서 탈 수 있었다. 저녁을 먹기 앞서 승차 플랫폼을 미리 확인해 두었다.
저녁은 하카타 역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지하 1층 식당가와 라멘 거리 중 고민하다 오랜만에 신신라멘을 다시 먹기로 했다. 신신라멘은 14개월 전, 내가 처음으로 일본 혼자 여행을 했을 때 갔던 첫 음식점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이번 여행의 시작도 신신라멘으로 정했다.
신신 라멘은 라멘 거리 바로 초입에 있는데 언제나 줄이 있다. 독특한 점은 오른쪽 벽 쪽 라인에 사람이 꽉 차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왼쪽으로 사람들이 알아서 줄을 선다는 것이었다. 내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일본사람이 매너 있고, 점잖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사람들은 대체로 가정에서 예의범절에 배운 덕에 매너가 몸에 배어 있다. 버스와 전철에서 통화하지 않고, 실내/실외에선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크기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줄을 질서 정연하게 서고, 자신이 만든 쓰레기는 봉지에 넣었다가 집으로 가져간다. 일본의 이런 점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북미, 유럽 쪽의 사람들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는데 14개월 전에 비해 모든 메뉴가 100~150엔 올라 깜짝 놀랐다. 전처럼 볶음밥을 추가할까 하다가 시간도 빠듯하고, 몸상태 탓에 쓴 침이 과다분비(?) 중인 상태라 라멘만 먹기로 했다.
반숙 계란이 추가된 계란 라멘을 주문했다. 가격은 970엔. 맛은 옛날에 먹던 그 맛이다. 하지만 역시 텐진에 있는 본점이 더 맛있다!
라멘을 먹고 라멘 거리를 한 바퀴 돌았는데 신신 라멘과 다른 라멘집(잇푸도인가?) 2곳만 줄이 길었다. 그래도 라멘은 회전율이 빠른 메뉴라서 금방 들어갈 수 있고, 1인 손님이면 카운터 석으로 더 빨리 안내받을 수 있다.
드럭스토어에서 한국에서 미처 다 챙기지 못한 물건을 사고 버스 터미널로 돌아왔다. 정기권 발매소도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지역에서 고속버스로 통근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후쿠오카는 대기업 지사가 많은 도시다. 그래서 젊은 회사원들이 많다. 일본은 직원들에게 교통비를 지원해 주는 문화가 있다. 아르바이트생도 예외가 아니다. 비싼 교통비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이 여러 지역을 날마다 오갈 수 있는 것은 교통비 지원과 정기권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20시가 되자 미야자키행 버스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모바일 예약내역을 보여드리고 바로 탑승했다. 일본의 고속버스 이용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규슈 고속버스 사이트를 찾고, 노선을 찾고, 예약하고, 결제까지 모두 처음 공부하는 것이라 한국에서 제법 시간을 썼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흔한 대도시를 가고, 흔한 루트를 이용한다면 머리 아플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의 정보를 따라 쉽게 다닐 수 있을 텐데... 사서 고생하는 날 보면 미련해 보일 때도 있다. 특히 여름에 갔던 홋카이도는 여행 준비 난이도가 가장 높았다. 여름 성수기가 겹쳐 숙소도 미리 예약해야 했고, 교통이 극악이라 시간표를 꼼꼼히 알아봐야 했다. 홋카이도에 비하면 규슈는 매우 쉬운 편이다. 이번 여행을 규슈로 정한 것도 와본 적이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물론 버스 한정으론 나도 초심자라, 버스에서 무사히 내리기까진 살짝 긴장했지만 앞으로의 여행 방법이 하나 더 추가됐다는 기쁨이 더 컸다. 실제로 계획을 실행하고 성공하면 정말 기분이 좋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나는 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라는 기분이랄까.
이동하는 버스 안. 하카타에서 히토요시까지는 고속버스로 2시간 40분이 걸린다. 요금은 3380엔. 인터넷으로 3~4주 전에 예약한 덕이다. 미리 예약하지 않거나 창구에서 현장발권하면 2000엔은 더 써야 한다. 일본의 고속버스 요금은 균일하지 않고, 장거리를 이동한다면 버스라도 교통비가 많이 든다. 물론, 탑승 직전에 가격이 더 저렴한 곳도 있다곤 하지만... 보통 1달 전부터 예매가 가능하니 2달 전에 미리 가격 추이를 살피고, 저렴한 예약 시기를 알아내면 좋다.
버스에 계속 앉아있자니 처음 1시간 반은 괜찮았는데 2시간이 가까워지자 좀이 쑤셨다. 의자가 엄청 작은 것도 아니고, 3열이라 공간이 충분한데도 비행기에 연이어 2시간 넘게 버스를 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늘 일정이라곤 이동밖에 없건만 벌써 피로가 쌓인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딱 좋은 타이밍에 휴게소에 정차했다.
시간이 늦어 밖에 있는 노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건물 내부에 있는 기념품샵은 24시간 운영하고 있었다. 구마모토 마그넷, 구마모토 기념품, 구마모토 성을 안고 있는 치이카와 등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여행 기념으로 마그넷을 구입하는 분들이 많은데, 여행기를 쓰는 것이 나에게는 마그넷 이상의 기념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14개월 전의 나였다면 여기서 기념품을 하나 샀을지도. 고작 14개월이 지났건만 경험이 참 많이 쌓였다. 2년 전 첫 여행땐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나중에 다시 오면 되지.'라는 말이 금전적 여유가 없는 나에겐 현실성 없게 느껴져서, 지금 할 수 있는 최대의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한 것이 많다고 더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바닥이 너덜너덜해 하루에 1~2개 일정밖에 소화하지 못했는데, 그때의 장소와 경험이 더 만족감이 높은 날도 많았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난 이후론 여행 욕심을 7할 이상 내려놓을 수 있었다.
휴게소에 세븐 ATM기가 있어서 현금을 마련했다. 덕분에 히토요시에서 세븐일레븐을 들릴 수고를 덜었다.
충분히 쉬었겠다, 5분 여유 있게 버스에 올라탔다. 참고로 일본의 고속버스는 어느 지역, 어느 버스회사에서 운영하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나도 고속버스 경험이 처음이고, 혼슈와 시코쿠, 홋카이도에선 이용해 본 경험이 없기에 "고속버스는 이렇다!"라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규슈만 해도 7개의 현이 있고, 지역마다 고속버스 회사도 다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 "일본 고속버스 가이드"를 제시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
히토요시 IC 도착 10분 전, 방송과 함께 화면에 정류소 이름이 떴다. 기사님께서 "내릴 분 있으십니까?"라고 물으시길래 곧바로 하차 버튼을 눌렀다. 출발할 때 기사님께서 예약 내역을 보시긴 하지만 손님이 내리는 정류소를 모두 기억하시는 건 아니다. 종점이 아닌 경유하는 정류소에 하차한다면 직접 하차 버튼을 눌러야 한다. 한국의 시외버스도 각 지역에 경유하는 방식으로 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경유 터미널에는 모두 정차해 주는데, 일본의 버스는 하차버튼을 눌러야만 정차를 해준다는 점이 우리와 달랐다. 이틀 후 일행에게 내 경험을 바탕으로 버스 타고 내리는 법을 알려주어야 했기에 무사히 하차 버튼을 눌렀을 때 긴장이 풀렸다. 선발대로써 역할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토요시 인터체인지에 도착하니 숙소에서 마중을 나와 계셨다. 사실 이 일화에는 배경이 있는데, 청주-후쿠오카 항공편 시간이 오후 4시인 데다 지연이 잦아 밤에 체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약 당시 숙소로 연락해 밤 10시 이후 체크인이 가능한지 여쭤봤고, 주인 분께서 항공권 때문이면 어쩔 수 없다며 내 편의를 봐주셨다. 대신 고속버스 탑승과 도착 전에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드리기로 약속했고, 도착 20분 전에 메시지를 드렸는데 해외 유심 때문에 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 말씀드리니 데리러 오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너무 감사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호스트(남편 분)께서 모리노 홀에서 왔다고 말씀하셨고, 곧장 택시로 이동했다. 모리노 홀에서 택시 왕복을 하느라 택시비가 1800엔 정도 나왔는데 택시비도 직접 내주셨다. 늦게 체크인한 것도 죄송한데 이런 과분한 편의를 받아도 되나 싶었다. 정말 감사했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과 공용 공간 안내를 받았다. 모리노 홀은 총 4개의 독실이 있으며, 거실, 화장실, 욕실은 공용이다. 내가 체크인한 날에는 2명의 손님이 더 있었는데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안내받은 방은 가장 아담한 객실이었으나 내겐 충분히 넓었고, 히터를 바로 틀어주신 덕분에 매우 따뜻했으며, 포근한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첫 만남부터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았기에 이곳에 묵는 2박 동안 최대한 깨끗하게 머물고 가기로 다짐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작은 방 하나에 누워있을 뿐인데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느낌이다. 작은 등을 하나 켜고 집에서 가져온 나츠메 우인장 단행본을 읽으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가능하다면 이 방에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머물고 싶었다. 그 정도로 좋았다. 언젠가 다시 갈 수 있을까? 이 방에, 이 침대에 누워 이때의 기분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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