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오도리 고엔 역에 도착했다. 삿포로 도심의 중심에 있는 역답게 깔끔하다.
지하 통로의 계단을 올라...
수프카레 킹에 도착했다. 한국인에게 유명한 삿포로의 스프카레 집은 3군데가 있다. 스아게 플러스, 스프카레 가라쿠, 스프카레 사무라이. 지금도 이 세집은 줄을 선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코로나로 하늘 길이 막힌 사이 삿포로 시내에 개성 있는 스프카레 집이 많이 생겼다. 유명한 집이 아니어도 충분히 맛있는 수프카레를 맛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선택지가 넓어진 건 기쁜 일이다.
스프카레 킹은 최근 현지인에게 사랑받는 스프카레 집이다. 총 3개의 지점(본점, 센트럴, 게이트웨이점)이 있는데 내가 찾은 곳은 오도리 고엔역에서 3분 거리의 센트럴 점이다. 센트럴 점은 지하 1층에 위치해 있다. 관광객에게 가장 접근성이 좋은 지점이다. 참고로 게이트웨이점은 삿포로역과 홋카이도대학 사이에 위치해있고, 본점은 난보쿠선의 미나미히라기시역에서 가깝다.
이집도 오픈시간에 웨이팅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후 2시에 갔더니 웨이팅은커녕 홀도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애매한 시간에 오면 좋다.
치킨 스프카레, 맵기 3, 밥 보통으로 주문했다. 이번 여행의 2번째 스프 카레다. 킹의 스프카레는 다른 집의 카레보다 색이 노란 편이었다. 한 입 먹어보니 향신료의 맛은 강하지 않고, 버터인지 기름맛인지 아무튼 독특한 맛이 강했다. 기름진 북해도 음식의 특징을 잘 말해주는 한 그릇이었다.
한국인들은 브로콜리 토핑 추가를 많이 하는데, 나는 기본을 즐기고 싶어서 토핑 없이 주문했다. 닭고기와 야채 양이 많아서 토핑 없이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너무 기름져서 도야의 수프커리 모그모그의 카레처럼 국물을 마실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기름진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다 못 먹고 남길 정도로 안 맞았다.
난 유행을 따르는 걸 좋아하지 않고, 관광객 맛집은 현지인 맛집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해외에서 한국인에게 유독 인기 많은 집은, 현지의 음식을 외국인도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어 인기 있는 게 아닐까? 관광객 맛집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부하거나 진정한 맛집이 아니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다. 그저 맛있게 먹고, 여행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면 충분하다.
스프카레를 먹으니 오후 3시. 다음 일정은 기타히로시마에 있는 F Village다. F Village는 홋카이도를 연고로 하는 닛혼햄 파이터스의 신 돔구장이다. 워낙 시설이 좋은 야구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여러모로 알아보던 중 유료 투어에 대해 알게 됐다. 경기가 없는 날은 구장의 그라운드를 직접 밟아 볼 수 있는 2가지(프리미엄, 베이직)의 투어가 있다. 프리미엄 투어는 매진이라 17시에 있는 일반 투어를 예약했다.
일요일에 경기를 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삿포로는 처음이라 많은 시간을 쓰기엔 부담스러웠다. 야구 관람은 이동 시간, 발권 시간, 스토어 구경 시간, 음식과 맥주를 사는 시간, 관람 시간까지 따지면 최소 7시간은 잡아야 하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걸 감수하고도 직관은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경기 없는 날의 야구장도 신선하니 재밌을 것 같았다.(참고로 난 야구 골수팬이다. 국내 구장을 도장 깨기 중이며 9군데 중 6군데를 가보았다. 광주, 창원, 대구가 남았다.)
도자이선을 타고 종점인 신삿포로에 도착, JR로 갈아타기 위해 도보로 3분 이동했다. JR 기타히로시마 역까지 340엔. 쾌속 에어포트가 계속 있었지만 요금 체제를 잘 몰라서 종이티켓을 발권했다. 시간도 여유가 있었고 말이다.
기계로 발권하면 출발역, 지정역 입력이 아니라 해당 구간에 맞는 요금을 선택하는 식이다. 나는 신삿포로>기타히로시마까지 요금이 340엔이라 340을 선택했다. 여기까진... 30분 뒤에 야구장에 도착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야구장에서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ㅠㅠ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로컬선을 기다리다가 반대 방향 열차를 타고만 것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번 여행에서 열차를 잘못 타는 실수는 처음이라 더 당황했고, 셔틀버스 시간까지 다 꼬여서 더 멘붕이었다. 5시에 시작하는 투어 시간까지 맞춰 도착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개찰구 앞에서 기차 시간을 보는데 피가 빠르게 식는 느낌이었다. 분명 4시까지 도착할 수 있는 일정이었는데 순간의 실수 하나로 이리 일정이 꼬여 버리다니... 심지어 인터넷 예약이라 취소도 불가했다. 17시까지 못 가면 그냥 1800엔이 날아가는 것이다...
16시 14분의 이와미자와행 로컬선을 타면 기타히로시마역에 16시 40분 도착. 45분에 역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야구장에 50분 도착. 버스에 내려서 뛰면 17시 투어를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타히로시마역에서 타는 버스보다 비싸긴 하지만 신삿포로역에서도 출발하는 셔틀이 있었는데... JR 요금까지 따지면 셔틀버스가 더 나았다. 뚜벅이로 파이터스 신구장을 가시는 경우, 갈 때는 신삿포로에서 셔틀버스 타는 것을 추천한다. 나처럼... 황당한 실수는 하지 않길 바란다.
이와미자와행 치토세선이 도착했다. 이쯤 되니 그냥 하늘에 뜻을 맡기기로 했다. 운이 좋으면 제시간에 도착하겠지. 기차나 버스 시간은 내가 어찌할 수도 없으니... 멍청 비용과 시간이 발생하긴 했지만 이런 사건(?)이 아니면 내가 언제 시로이시 역에 와보겠나.
드디어 제대로 된 역에 도착했다. 기타히로시마역에서 내리는 사람이 많은 걸 보니, 제법 규모가 큰 역 같았다. 실제로 기타히로시마역은 홋카이도에서 10번째로 이용객이 많은 역이라고 한다. 주변 인프라도 좋고, 공항과의 접근성도 우수하며, 마을도 조용하고 쾌적해서 살기 좋은 도시 같았다. 무엇보다 부러운 건 최신식 야구장이 집 근처에 있다는 것.
다행히 3분을 남기고 버스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이정표가 매우 잘 나와있으니 버스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야구장과 역 사이만 왔다 갔다 하는 버스인데 200엔이나 요금을 받는다. 탑승객은 야구장에서 돈 쓸 사람뿐인데, 이 정도면 야구장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쉬운 부분이다. 심지어 IC 카드도 안 된다... 현금을 꼭 준비하자.
5분을 달려 야구장에 도착했다. 2.3km라 걸어가면 30분. 오르막이라 200엔 내고 셔틀을 타는 게 낫긴 하다. 내려갈 땐 산책할 겸 천천히 도보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에스콘 필드 도착!!!
코카콜라 게이트(1루 출입구)가 잠겨 있었다. 경기가 없는 날은 3루 출입구만 개방하는데 그걸 몰라서 출구를 찾느라 5분 넘게 헤맸다. 나만 헤맨 게 아니고 도민들도 헤매더라(ㅋㅋㅋ)... 안내판을 설치해놓으면 좋으련만. 투어 시작 직전인데 들어가지 못하니 대략 난감이었다.
다행히 3루 쪽 출입구를 찾았다. 5분 전 들어갔는데 문제는 어디에서 투어를 시작하는지, 당최 보이질 않는다. 돌고 돌다 인포메이션 센터에 갔다. 영어로 5시 일반 투어를 예약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으니 젊은 직원이 셋이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급한 건 나인데 직원들이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파파고를 보여주니 한 직원이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직원을 따라가니 투어가 막 시작한 듯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예약 큐알 코드를 캡처해 둔 덕에 코드를 스캔하고 바로 투어 목걸이를 받을 수 있었다.
투어는 총 50분 동안 진행되며 다이아몬드 클럽 라운지를 시작으로 라운지 안과 밖을 모두 도는 형식이다. 설명은 일본어로만 진행된다. 일어가 가능한 분, 또는 동행이 일어가 가능할 경우 오면 좋다. 설명이 알차서 돈값을 한다.
다이아몬드 클럽 라운지에 들어와 중앙석에 앉았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포수 후면석. 설명 후 사진 찍을 시간을 따로 주신다. 사진, 동영상 촬영은 가능하지만 SNS 업로드는 불가하다고. 근데 구글 리뷰에 가니 투어 사진 올린 분이... 정말 많더라. 아래는 투어 없이도 볼 수 있는 공간 위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 경기가 있는 날은 완전 분위기가 다르다. 에스콘 필드 내부는 이렇구나, 참고용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다.
야구팬이라면 당연히 아시겠지만, 닛혼햄 파이터즈는 오타니 쇼헤이의 일본 친정팀이다. 이제 일본보다 미국에서 활동한 시즌이 한해 더 많고, 앞으로 더 늘겠지만 오타니를 추억하는 파이터스 팬들도 많을 테지. 한화 팬들이 류현진을 추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2번째 토미존 재활 후 류뚱이 완전 부활해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메이저에서 100승을 채웠으면 하는 바람과 한편으론 한화에 돌아와 주길 바라는 바람이 상충한다.
최근 오타니의 부상 이슈가 있지만 잘 재활해서, 메이저에서 오랫동안 그의 야구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언젠가 미국에 가서 그가 선발 투수로 뛰는 경기를 꼭 보고 싶다.
마지막은 그라운드 투어. 더그아웃에 앉아볼 수 있다. 그라운드는 밟아볼 수 있지만 흙만 가능하고 잔디는 밟을 수 없다. 설명에 따르면 구장의 흙과 잔디는 모두 홋카이도에서 공수한 것이라고. 가장 궁금했던 건 유리창이 깨지면 어떻게 하나였는데, 유리창이 타구로 깨지면 스마트폰 사이즈의 작은 유리로 수리하는 기술이 있다고 한다.
투어 종료. 목걸이를 반납하고 계단을 올라간다.
다르빗슈와 오타니. 무슨 말이 필요한가?
플래그쉽 스토어 구경. 넓고 쾌적해서 정말 좋았다. KBO,,, 본받자. 이글스,,, 신구장은 스토어 넓게 부탁한다. 일본은 유니폼이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어센틱 기준으로 비교하면 한 장은 장만할 만하다. 레플리카처럼 값싼 라인이 없는 건 아쉽다. 그래도 다른 굿즈 종류가 많은 건 좋더라. 단순한 구단 홍보를 넘어서 지역 홍보도 되니까. 선물이나 기념품으로 사기도 좋고. 티셔츠가 예뻐서 살까 고민했는데 여행 막바지라 쓴 돈이 많아서 참았다. 참고로 계약한 의류 브랜드는 챔피온. 돈 벌어서 나중에 사러 올게...
외야석 정중앙에 앉아서 찍은 사진. 어느 구역에 앉아도 뷰가 좋다. 널찍한 좌석 간격과 푹신한 의자, 음료통까지. 감동스러운 포인트가 잔뜩이다. (잠실, 문학, 대전 보고있나? 의자 좀 크고 편하게 만들어라 제발!) 청라 SSG 필드가 많이 참고했으면 좋겠다. 이글스파크는 신구장 지을 때 의자 좀 좋은 거로 바꾸자. 음식 주문도 수원처럼 QR코드로 바꾸고...
배가 고파서 한 바퀴 쭉 둘러보니 가격이 어마무시하다. 한국의 야구장보다 더 비싼 것 같다... 경기 없는 날이라 연 음식점도 몇개 없었다. 고민하다 핫도그를 샀다. 가격은 650엔. 개 비싸다. 이글스파크 핫도그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다행히 맛은 있었다. 이렇게 멋진 시설의 야구장에서 먹는데 맛이 없을 수 없지. 아, 집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 기타히로시마 시민분들,,, 부럽다ㅠㅠ
에스콘 필드의 타워 일레븐은 구장 안에 있는 호텔이다. 호텔 이름의 11은 다르빗슈와 오타니가 사용한 11번(영구결번)에서 따왔다고. 온천, 사우나, 박물관, 승마 클럽, 스크린 골프, 라디오 방송, 푸드홀이 함께 있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묵을 수 있다.
여름 행사가 있다고 하여 점등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 이날은 7월 7일로 행사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7월 7일부터 8월 27일까지 PLAY SUMMER를 진행, 9월 1일부터 10월 29일까지는 PLAY AUTUMN이 열린다.
19시가 되니 불이 켜졌다. 전통 음악과 경쾌한 북소리에 관객들이 들떠오른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등을 멍하니 구경했다.
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지만 1시간은 더 지나야 완전히 어두워질 것 같아 돌아가기로 했다. 셔틀버스 시간도 있고, 삿포로 시내에서 제대로 된 저녁을 먹었다. 머리를 많이 썼더니(열차를 잘못 탄 탓에) 피곤했기도 했고.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셔틀버스가 있었다. 역에서 올 때 내려주는 곳과 역으로 갈 때 버스 타는 곳이 다르다. 돌아갈 때는 앞문으로 탑승한다.
기타 히로시마역 도착. 7시 37분.
좋았다, F VILLAGE!
낮의 일 탓에 환승도 꺼려지고, 피곤 탓에 요금 따지기도 싫었다. JR을 타고 삿포로역까지 가기로.
삿포로 역에 도착했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하카타 역과는 다른 분위기다.
삿포로 TV 타워를 지나 아케이드 상가로.
목적지인 삿포로 교자제조소 너구리코지점에 도착했다. 여행 카페에서 맛있다는 글을 보고 왔는데 손님이 정말 많았다. 조금 기다려야 한단다. 발도 아프고, 새로 검색하기엔 피로도가 극에 달해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다행히 1인 손님이라 금방 자리가 났다. 오스스메(추천)의 기본 교자와 우롱 하이, 잔기 한 조각을 시켰다. 우롱하이는 바로 나왔는데 교자가 늦게 나와서 기다리느라 배고팠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손님들도 기본 20분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20-30분을 기다려 드디어 교자가 나왔다. 빛깔부터 죽인다. 맛은 더 훌륭했다. 육즙이 어찌나 가득하던지. 잔기도 살짝 짰지만 맛있었다. 다음에 삿포로 여행을 오면 재방문 의사 100%. 우롱 하이와의 궁합도 좋았다! 삿포로에서 먹은 음식 중에 부타동이랑 교자가 제일 맛있었다.
스스키노까지 볼 에너지는 없어 오도리 공원만 잠시 들리기로.
천천히 걸어 오도리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의 상징인 TV 타워 앞에서 사진 한 장!
막상 와보니 공원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싶었다. 근데 모두 같은 생각인지 공원에 자리가 없다. 분수대도, 벤치도, 연인 또는 친구와 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자리를 찾아 공원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드디어 빈 벤치를 발견했다. 주변에 사람도 적어 조용하니 딱이다. 근데 가까이 가니 검은색 지갑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걸 어찌해야 하나. 난감했다.
주인이 돌아올지도 모르니 우선은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근데 10분이 지나도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2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대로 두고 가는 것, 둘째는 경찰서에 맡기는 것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일본은 '분실물'의 경우, 경찰서가 아닌 파출소에 분실 신고를 해야 한단다. 구글 맵을 찾아보니 근처에 파출소가 하나 있었다. 어차피 뒤의 일정도 없겠다, 파출소로 향했다.
이 뒤는 조금 긴 이야기니 넘길 분은 패스해도 좋다.
나 : 오도리 공원의 벤치에서 지갑을 습득했습니다.
젊은 여경관 : 몇 시에 습득했나요?
나 : 10분 전이요.
젊은 여경관 : 공원 어디에서 주웠나요?
나 : (구글 맵을 보여주며) 여기에서 주웠습니다.
젊은 여경관 : 아, 2 구역이네요. (전화로) "오도리 공원 2 구역에서 지갑 분실물 들어왔습니다."
---------------- 잠시 후 ----------------
젊은 경관 A : 분실물을 찾아준 사람에게 지갑 안에 있는 현금의 일부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20% 정도 받을 수 있어요. 물론 이 지갑엔 돈이 거의 없긴 하지만... 받으시겠습니까?
나 : 괜찮습니다.
A : 알겠습니다. (종이에 기록한다.) 주인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직접 받을 수 있습니다. 대신 개인의 전화번호가 그대로 노출되는데요... 감사 인사를 받고 싶으신가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나 : 괜찮습니다.
A : 그럼 전화 대신, 지갑의 주인이 물건을 잘 찾았다는 내용의 서류를 원하시나요? 종이를 받는 편이 안심 된다면 서류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 : 네, 부탁드립니다.
A : 알겠습니다. 대신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이후에 일정이 있으신가요?
나 : 없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A :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 잠시 후 ----------------
중년의 경관이 스마트폰에 무언가 열심히 말한다. 하지만 번역이 잘 되지 않는지 같은 내용을 3번 반복한다. 일본어로 말씀해도 되는데... 외국인이라 말이 안 통하겠거니, 당연히 번역기를 사용하고 계셨다. 이대로는 대화하기까지 한참이 걸리겠다 싶어,
나 : 일본어도 괜찮습니다.
젊은 경관 A, B : (완전 빵 터짐). 중년 경관 C : (놀라움 + 당황 + 벙찜)
나 : (웃음) 듣기는 가능합니다.
B : (호탕하게 웃으며) 일본어를요? 따로 공부한 겁니까?
나 : 네, 혼자 공부했습니다.
B : 독학으로?
나 : 네, 독학으로요.
B : 독학! 대단해! 혼자 여행 온 거예요?
나 : 네, 혼자 여행 왔어요. 홋카이도를 열흘 동안 여행했습니다.
B, C : 열흘이나! 어디 어디 다녀왔어요?
나 : 노보리베츠, 토야코, 하코다테, 아사히카와, 비에이, 오타루, 삿포로요.
C : 지금 마침 라벤더가 딱 예쁠 때죠. 잘 왔네요.
나 :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네, 라벤더 정말 예뻤어요.
C : (내 가방을 가리키며) 마침 가방도 딱 라벤더 색이네요! (웃음) 외국인 여행객이 많긴 하지만,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 그것도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혼자 여행객은 드문 것 같아요. 그렇죠?
나 : (공감하며) 네. 별로 없는 편이지요.
B : 일본에 여행 온 이유는 뭔가요?
나 : 일단 작년에 규슈 여행을 간 적이 있기도 하고요. 음. 일본의 문화라던가, 음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B : 오! 어떤 가수 좋아하나요?
나 : 히게단 좋아해요. 사실 처음은 애니메이션이었어요.
B : 히게단! (크으~ 뭘 아는구만 하는 표정) 애니는 어떤 작품 좋아해요?
나 : 진격의 거인이요. 그 외에도 많이 있고요.
C : 슬램덩크 알아요?
나 : 네, 알죠.ㅎㅎ 근데 제 세대의 작품이 아닌지라.ㅎㅎ(물론, 필자는 덕후니 슬램덩크를 당연히 봤다. 다른 스포츠물을 너무 많이 봐서 큰 감동이 없었을 뿐...)
A, B, C : (다 같이 호탕하게 웃는다.)
나 : 작년에 개봉한 슬램덩크 영화, 한국에서 대인기였어요. 지금도 인기 많고요.
C :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나요?
나 : 이틀 후 돌아갑니다.
C : 이틀 후면... 일요일?
나 : 네, 일요일에 돌아갑니다.
C : 얼마 안 남았네요. 남은 시간 동안 즐겁게 보내다 가요.
나 : 감사합니다:)
A : 부탁하신 종이 다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 서류를 폐기하실 땐 꼭 가위로 오려서 버려주세요.
나 : 네,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예상외의 에피소드가 생겨서 참 즐거웠다. 20분 정도 대화했으니 실제로는 위에 쓴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번 여행은 보고 먹은 것보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 기억에 남는다. 함께 셀카라도 찍을 걸 그랬다.
파출소에서 나오니 10시 반. 몸은 피곤하고, 머리도 빠릿빠릿 안 돌아가고, 발바닥은 아프지만 좋은 일을 하고 나니 기분이 참 좋았다. 삿포로 TV 타워가 보이는 곳에 다시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노는 걸 구경했다. 공원의 젊음과 활력이 참 좋았다. 어제는 오타루 당일치기를 하느라 삿포로 도심을 걷는 건 이날이 첫 밤이었는데, 마치 몇 년이고 몇 번이고 온 공원 같았다. 그만큼 이 공원이 마음에 들었다. 세월이 지나 몇 번을 방문해도 오도리 공원은 내게 항상 특별한 곳일 것 같다.
삿포로의 첫날 여행기. 다들 재밌게 보셨을지 모르겠다. 내일은 오전에 북해도 박물관과 개척촌을 구경하고, 오후에 삿포로 시내로 돌아와 삿포로 역부터 스스키노까지 쭉 걷는 여행을 하려고 한다.
물론 마지막 날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 투성이지만, 이날 밤의 나는 모르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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