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5일. 작렬하는 태양빛이 뜨거웠다.
와타야 벳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 즈음 체크아웃을 했다. 원래 계획은 아침 9시 전에 기차를 타 11시에 구마모토 역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날 버스에서 넘어져 다리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여독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 다치지 않고 무사히 귀국하는 일이 가장 중요했기에 구마모토를 많이 둘러보지 못하더라도 기차 시간을 늦추기로 했다.
어제 와타야 벳소까지 버스로 이동했기 때문에 오늘은 역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도중에 한 은행나무를 만났는데 은행 잎이 햇살을 받고 노란 자태를 뽐냈다. 이런 여유를 즐길 수 있다니. 기차 시간을 늦추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레시노 온센 역에 도착하니 마스코트인 유츠라 군이 반겨준다. 일본은 지역 기념품을 비롯해 마스코트 홍보에 진심이다. 특히 구마모토의 쿠마몬이 매우 유명한데 난 이 유츠라 군이 더 귀여웠다. 쿠마몬은 뭐랄까. 강렬하지만 눈이 무섭다...
우레시노 온센 역은 이용객이 많지 않다. 인구 수가 적은 탓도 있지만 북규슈의 서쪽은 다케오 온센 역이 환승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구마모토로 이동하기 위해선 다케오 온센 역, 신토스 역에서 1번씩 총 2번의 환승을 해야 한다. 니시 규슈 신칸센 라인은 지역 간 사정으로 반드시 환승을 거쳐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 릴레이 가모메는 이 사정에서 나온 운영 방식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있는데 이 릴레이 가모메 방식을 잘 몰라 일정이 밀릴 뻔했다. 다케오 온센 역에서 모든 승객분들이 내리길래 혼자 멀뚱멀뚱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 플랫폼으로 환승해야 하더라. 열차 번호 역시 옆 카모메에게 옮겨갔다. 옆자리 노신사 분이 '이 친구는 왜 안 내리지?'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셨는데...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환승시간이 3분이라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릴레이 카모메를 이용할 분들은 꼭 참고하시길...
기차 시간까지 40분이 남아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기차 시간을 늦춘만큼 구마모토 일정에서 무엇을 뺄지 고민하다 보니 40분이 금방 흘렀다. 구마모토성 전망대와 서점, 오코시키 해안을 가고 스이젠지 주조엔과 구마모토 현청(루피 동상)을 빼기로 했다. 화창한 날의 스이젠지를 포기하기엔 아까웠지만... 스이젠지는 시내 근처니 나중에 갈 기회가 있으리라. 오코시키 해안은 날씨가 도와주어야만 절경을 볼 수 있다. 몸은 고되고, 교통편이 불편한 목적지이나 하늘을 보니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신토스까지 데려다 줄 카모메가 도착했다. 2022년 9월 23일에 운행을 시작한 따끈따끈한 특급열차다. 요즘 철도 덕후 사이에서 가장 핫한 기차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레시노에서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카모메를 봤는데 정말 빨랐다.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는 말도 부족하다. 일부러 탑승 플랫폼 몇m 뒤에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는 이유가 납득되었다.
구마모토까지 데려다 줄 쓰바메가 도착했다. 가모메처럼 둥글고 하얀 친구였다.
구마모토에 가까워질수록 작고 큰 산, 넓은 녹지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사가현도 규슈 올레길이 있는 등 산이 제법 아름다운 지역이지만... 구마모토는 산지가 많고, 아소산까지 품고 있어서 그런지 더 본격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냥코센세도 구마모토에 가까워진 걸 알았는지 기뻐 보인다. 냥코 센세의 동네는 구마모토현의 히토요시 시다. 히토요시 시는 구마모토시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선생에게 미안하지만 JR 북규슈 레일패스로는 갈 수 없어서 생략했다. 히토요시는 다음 남규슈(가고시마, 미야자키, 구마모토) 여행 때 3일 이상 머물 계획이다.
구마모토 역에 도착해 신칸센 개찰구로 나오니 쿠마몬이 반겨준다. 관광객들이 인증샷을 남기느라 바빠 보였다. 잘 만든 지역 마스코트임은 인정하나 내 눈엔 냥코 센세가 훨씬 귀여웠다. 선생도 자기가 더 귀엽지 않냐고 말하는 것 같다.(ㅋㅋㅋ)
신칸센 개찰구를 나오기 전에 작은 패밀리 마트가 하나, 개찰구를 나와 큰 패밀리 마트가 하나 있다. 개찰구를 나오면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이 모여있는 공간이 있다. 규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답게 역의 규모가 제법 컸고, 잘 꾸며져 있었다. 역에서 나오면 바로 아뮤플라자와 이어져 있어 쇼핑하기도 좋아 보였다. 아뮤플라자 1층 카페에서 나는 빵 냄새가 미쳤다...
JR 유인매표소 맞은편에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면 각종 여행 팜플렛이 있다. 나는 트램 일일권을 구매하기 위해 들렸는데 코로나 이후에 모바일로 트램 일일권을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모양이다. 가격은 실물 티켓의 500엔과 동일했다. 구마모토 역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여행을 시작하시는 분, 시간을 절약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구입한 트램 일일권 실물 티켓이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 분이 영어를 매우 잘하셨다. 발음도 좋았다. 7박 8일 여행 동안 외국인 응대와 빠른 일처리는 이곳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트램 일일권 사용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종이를 펼쳐 티켓을 사용할 날(연도, 월, 일)을 긁어낸다. 트램에서 내릴 때 기사님께 날짜가 보이도록 티켓을 보여드리면 된다.
구마모토의 노면전차는 A노선과 B노선이 있다. 구마모토 역은 A노선만 지나간다. 8번 가라시마초에서 B노선으로 갈아탈 수 있지만 구마모토 번화가와 구마모토성 모두 A노선으로 갈 수 있어 B노선을 이용하실 일은 많지 않다. B노선으로 방문할 만한 곳은 나가사키지로 서점과 구마모토 현립박물관이 있다. 8번 가라시마초부터 26번 켄군마치까지는 두 개의 노선이 겹치니 해당 구간에 속하는 스이젠지를 가실 땐 시간이 맞는 노선을 타면 된다.
A노선을 타고 구마모토 성 정류장에 도착했다. 오늘 묵을 숙소, 구마모토 호텔 캐슬에 짐을 맡기러 간다.
2시 경. 호텔에 도착하니 직원 분이 맞아주신다. 로비에선 영어가 가능한 서양인 직원 분이 응대해주셨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2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직 체크인이 되지 않는지 짐을 맡아주신다고 했다. 일본인 직원 한 분이 더 오시길래 지금 체크인되냐고 물으니 통상적으론 3시부터지만 지금도 가능하다고 한다. 두 분의 말씀이 달라 결국 재차 다시 물은 후에야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직원 분들이 친절하셨지만 뭔가 살짝 어리바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016년 4월. 두 번의 강진이 구마모토를 강타했다. 이 당시 관측된 가장 강한 진도는 무려 진도 7.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의 최고 단계였다. 헤이세이 28년 구마모토 지진은 1995년 고베 대지진, 2004년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 2011년 도후쿠 대지진에 이어 4,5번째 사례로 기록된다. 규모는 작았으나 진원이 워낙 얕아 피해가 극심했다. 구마모토 성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고, 성의 지붕과 벽 상당 부분을 잃었다. 현재는 거의 복원되었고, 일부는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무력하다. 사람이 쌓아 올린 많은 것들이 한순간에 없어지니... 구마모토에 다시는 지진이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구마모토 시청에서 20분 정도 걸어 나가사키지로 서점에 도착했다. 구마모토에 늦게 도착했음에도 이 서점은 일정에서 뺄 수 없었다.
나가사키지로 서점은 1874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100년이 훌쩍 넘은 서점이다. 2층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로 커피 맛이 좋다. 영업시간은 11시부터 7시. 조그마한 서점이라 책이 많지 않다. 하지만 한 바퀴 훑으며 서점 주인이 제법 신경 써 책을 골랐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뒤에 일정이 없었더라면 마음에 들었던 책을 사 2층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했을 텐데... 아쉽다.
나가사키지로 서점은 과거 나츠메 소세키가 들린 서점으로 유명하다. 나츠메 소세키는 구마모토 대학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4년 3개월 동안 구마모토에 머물렀다. 그가 머물렀던 집이 지진으로 휴업중이나 2022년에 개관 예정이다. 그의 대표작「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재밌게 읽어서 꼭 와보고 싶었다. 100년 전의 사람이건만 이렇게 서점 하나로 교집합이 생기다니. 참 재밌다.
서점에서 아쉬움을 뒤로 한채 미스미선을 타기 위해 구마모토 역으로 왔다. 구마모토 역으로 돌아간 길에 난 1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것... 서점에 집중하느라 밥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시간은 3시 55분이었다. 하지만 1시간에 1번 있는 미스미선의 출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처음 가는 역에선 항상 여유 시간을 두는 것이 내 원칙이었기에 편의점에서 뭘 살 여유도 없이 재래선으로 들어갔다. 내 가방엔 생수 1병이 전부였다.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습관이 여기서도 한 건 했다...
사람, 편의점, 식당 하나 없는 마을로 가는 미스미선에 타 버린 나. 필자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다음 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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